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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유적

    문화유적 답사코스

    문화유적
    기장읍성

    기장읍성

    위치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310번지 일대.

    찾아가는 길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기장초등학교에서 100m이내.

    소개

    기장읍성은 축성으로 된 성곽의 일부가 보존되어 있다. 이읍성은 고려 공민왕 때인 서기 1356년 흙으로 축성된 것을 이후 세종 3년(1421년)~세종 7년(1425년)에 다시 석축된 것으로 이곳 동문에서 오른쪽으로 약 3백미터 지점에 북문이 있고, 전체 둘레가 1천6백여미터이고 높이는 4미터라고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이성을 방패삼아 항전하여 기장고을을 지켰던 유서깊은 성으로 현재는 성 곽의 높이는 4미터, 길이는 100미터 정도가 남아 있다. 성안 동헌옆에는 큰 우물이 있었는데 기장 초등학교에서 최근까지 그 우물을 이용하기도 했다.동헌자리는 높은 등성이에 있고 동쪽의 석축은 원형 그대로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읍성 터라고 부르고 있다. 남문은 대라리의 남문안, 남밖이라는 곳에 있었고 동문은 동부리의 동문안 밖에 동문터가 있고, 북문은 서부리 82번지에 그 터가 있다.

    성내에는 공청으로 동헌,차성관, 직사루, 조서루, 식파루, 장관청, 영방, 군기고 등이 있었고 성문밖에는 망풍정 홍진 루 관덕정과 얼음 창고인 빙고가 있었으며 현 포교당 앞에 구마지가 남아 있다. 성황사는 북쪽 4리에 있었는데 고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곳이다. 사직단은 대라리의 사라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에 있었는데 이곳을 새마지(새직골)라 한다. 이곳에서 토신과 곡물신을 제사하기 위해 오색사로 쌓은 5척의 사직단이 있었다. 원래 군유지였던 이 성터는 지난 80년 양산군 시절에 개인에게 불하되어 기장초 등학교와 민가가 들어서 있어 문화재 보호와 관리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동안 관리 부실로 많은 부분이 허물어지거나 민가의 담장 등으로 이용되고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기장읍성에 대한 문화재 지정은 경상남도 양산군 시절이던 지난 1993년 이일대 18필지 1,830㎡에 대해 경남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으며 우리군이 부산광역 시로 편입된 이후인 96년 5월25일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고 이 일대를 문화 재 및 보호구역으로 지정한 바 있다.

    공덕비군

    공덕비군

    위치 :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306번지

    찾아가는 길 : 기 장읍 동부리 306의 2, 기장초등학교 앞

    소개

    기장읍 동부리 306의 2, 기장초등학교 앞에 옛날의 선정비가 50개 정도 한곳에 세워져 있다. 그 동안은 선정비가 기장 곳곳에 산재해 있어 더러는 유실되고 또 제대로 관리를 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을 문화재가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 하던 당시 국제신문 기자였던 기장읍 거주 공태도씨가, 기장 곳곳에 산재해 있던 공덕비 50개를 모아 군청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고 또 교육장으로부터 현위치에 공덕비군을 세우는 것을 허가 받아 지금의 공덕비군을 설치한 것이다.

    우리군에서는 공덕비군에 원목 테두리를 새로 설치하고 잡초가 무성했던 바닥에 잡초를 제거하고 자갈을 깔아 새롭게 정비했다.

    공덕비는 그 대다수가 기장 현감들의 선정비이고 어사, 관찰사의 것도 있다. 그 내용은 "영 생불망비"라고 새겨져 있는데 전국에 있는 선정비와 같다. 백성을 위하여 선정을 배푼 공덕 비이지만 억지로 주머니를 털고, 아첨하기 위하여 세운 것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종 때는 이런 엉터리 선정비의 철거를 명한 일도 있었고, 백성들은 선정비의 꼴이 보기 싫어서 몰래 뽑아서 근처 논두렁의 돌다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기장향교

    기장향교

    위치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 62번지일대, 교리초등학교 북쪽에 위치한다.

    찾아가는 길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교리 교리 초등학교에서 200m이내.

    소개

    현 기장향교는 영조 34년(1769)에 세워진 당시 관립학교다. 성내에 있던 향교를 광해군 9년(1617)에 현북3리로 옮겼으며 영조 34년(1769)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서울에는 성균관이 있어 대학의 구실을 한 반면 지방에는 향교를 지어 지역의 문화를 교화하고 유생에게 소학, 사서오경을 교육하였으며 성균관과 마찬가지로 문묘를 모셨던 곳이다.

    또 향교는 당시 국고에서 지급하는 학전이라는 재원으로 운영되었는데 학전을 관리하던 사람을 전교로 하여 따로 두었으며, 교관으로 교수와 종9품에 해당하는 훈도와 학장이 있었다.

    대성전을 비롯해서 신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풍화루, 세심문 등 7동의 건물이 있다. 외삼문은 솟을 3문으로 세심문이란 편액이 있고, 세심문 안에는 중층 팔작 지붕의 풍화루가 있으며, 명륜당 좌우에는 동?서재가 있다. 건물을 경사지에 배치하고 외삼문 안에는 명륜당을 두고 내삼문 안에는 대성전을 배치하여 전학후묘의 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경내 건물들은 조선후기 이후에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4성을 배향하고 있고 동무와 서무는 중국의 저명한 유현 4분과 우리 나라의 유현 18분 등 27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초정일(初丁日)에 유림들에 의해 석전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건물 구조는 입구인 세심문은 맛배지붕에 3간이고 풍화루는 주심포계의 팔작지붕에 정면 3간, 측면 2간의 2층 건물이다. 명륜당은 정면 3간, 측면 2간의 주심포계 맛배지붕에 목조와가이고 대성전은 주심포계 맛배지붕에 정면 3간, 측면 2간이다. 향교는 애당초 유림들의 국립 중등교육기관으로 출발하였으나 조선후기로 들어서면서 유생을 교육하는 기능보다 민간에 도덕적, 예양적 향풍을 수립하는 일에 힘썼다고 전하고 있다.

    기장향교에서는 우리의 전통윤리와 미풍양속을 어린 세대에 교육하여 건전한 가치관과 예의범절을 함양시키기 위하여 매년 여름방학을 이용해 청소년 대상으로 "향교충효교실"을 운영해 오고 있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 215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39호로 재지정 되었다.

    시랑대

    시랑대

    위치 : 기장읍 동암리

    찾아가는 길 :용궁사(수산진흥원) 입구에서 하차 250m지점

    소개

    귀양살이라 하지만 오히려 신선이 노는 봉래산을 가까이 두고 있다. 이 사람은 이조참의(현 내무부국장급)에서 여기에 왔노라. 시랑대란 석자를 푸른바위에 새겨 천추의 긴 세월동안 남아 있게 하리라.

    동해남부연안에서 제일 명승지로 알려진 기장읍 동암리 시랑대 높다란 바위에 각자된 권적 기장현감의 시문이다. 권적은 영조9년(1733년)에 기장현감으로 좌천되었는데 시간이 날때마 다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파도가 흰거품을 물고 밀려올 때 마다 조개들이 부엌에서 아낙네들이 쌀씻는 소리와 같고 그 위를 나는 오색 찬란한 비오리가 춤을 추는가하면 노송 우거진 절벽을 찾는 달빛은 과히 인간세상에서 보기 드문 절경이었다. 그래서 권적은 속인들이 부르던 원앙대를 고려때 이조참의격인 시랑의 벼슬을 따 시랑대로 이름을 바꾸고 바위에 시를 남겼다. 얼마나 경치가 좋았길래 멀리 중국에서도 해동국 조선의 시랑대를 못보고 죽으면 한이 된다고 했을까.

    시랑대를 운잡아 많은 한시가 나타나 있다. 그러나 시랑대 바위에 새겨진 한시는 겨우 두문 뿐이고 나머지는 최근들어 거의 파손되었다. 1960년도 들어 구들장용으로 시랑대의 바위를 마구잡이로 캐내고 도로 개설 등으로 바위가 많이 파손되 버렸다.

    그때 시랑대의 바위를 훼손한 사람들이 화를 당하거나 곤욕을 치렀가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무튼 조상들의 얼 이 담긴 유서깊은 시랑대를 망가뜨린 것은 우리들에게 두고두고 한스럽고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대원군 척화비

    대원군 척화비

    위치 : 기장 척화비는 기장군 기장읍 대변리 608번지 수협대변지소 뒷편 노송 밑.

    찾아가는 길 : 대변마을 하차. 500m이내.

    소개

    대원군 척화비는 부산광역시 지정기념물 제41호(1996. 5.25)호 지정되었다. 당초에는 대변항 방파제 안쪽 동해바다가 굽어 보이는 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때 항을 넓히면서 일본관리들에 의해 뽑혀져 그 밑 바다속에 버려진 것을 해방후 1947년 경 마을 청 년들이 인양하여 현재의 위치에 세웠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대변항 일대가 개발되면서 동해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방파제 끝에 옮겨 세워졌던 척화비가 주변 건물들로 둘러쌓이게 되자 최근 척화비를 다시 옮길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척화비는 고종때 대원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 승리한후 외국을 배척하고 쇄국주의를 고창하기 위하여 전국 주요지 곳곳에 세웠던 것으로 양산과 동래에도 있는데 양산 것은 문 화재로 지정되고 있다.

    대변 척화비는 높이 144㎝ 폭 52.5㎝ 두께 21㎝ 규모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전국적으로 똑같이 '서양 오랑캐가 침범 하는데 싸우지 아니하고 화친 하 고자 주장 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 먹는 것이니 우리 만년 자손에게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움'으로 되어 있다.

    서기 1886년 한해 동안 미국상선이 부산진 앞바다에 와서 교역을 청하고 미국상선 제네랄 샤아만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올라오자 민중들이 그 배를 불살라 버리는 일이 일어 났다. 그리고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침입한 뒤 서울로 침입하려는 것을 우리 군사가 물리 친 병인양요가 또 일어났다.

    1870년에는 독일군함이 부산항을 침범하고 1871년에는 미국함 대가 제네랄 샤아만호를 불살라 버린 사실을 묻는다고 강화도를 침입하다가 조선군과의 백 병전 끝에 물러난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1875년에는 서양 선박인, 이양선이 경기도 연안으로 출몰했다. 그렇게 바다로 해서 침입하는 무리를 민중의 힘으로서건 관군의 힘으로서건 물리 친 것은 사실이었다.

    대원군은 그렇게 외세를 물리친데 대해 보다 의기 양양해져, 척화비를 서울 동래 등지에 세우고 쇄국책을 더욱 더 굳혔다. 1873년 마침내 대원군이 하야되고 민비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1875년에 일본은 정한론을 세우고, 운양호를 강화도로 침범케하여 포 격사건이 일어났다.

     대죽성왜성

    죽성왜성

    위치 : 기장읍 죽성리 산 52-1번지 일대(서쪽 봉대산이 동쪽으로 뻗어 내리다가 바다로 빠져들기 직전에 불룩 솟은 작은 봉우리 위에 봉우리 전체를 기반으로 남아있다)

    찾아가는 길 :죽성리 월전마을에서 하차400m이내

    소개

    이 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해인 서기 1593년 6월경 구로다 나가사마가 쌓고 지키던 왜성으로 부산왜성과 비슷한 석성이나 원형을 잃어가고 있다.

    이 왜성은 울산의 서생포성과 학성, 그리고 부산성을 연결하는 중간 요충지이기도 하다. 네모진 바위돌로 비스듬히 축조되어 있는데 성벽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성역은 총 11,776평이고, 성벽의 총 연장은 약 300미터, 둘레는 약 1㎞, 높이는 약 4미터로 전형적인 왜성이며 성안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다.

    남해안 일대에 왜성은 18곳이 있었는데 정유재란 때까지 왜적이 굳게 지켰던 성은 부산성과 가덕성 뿐이었다고 하니 이 죽성리에 있는 왜성은 초기에는 왜적들이 지키고 있다가 뒤에는 빈 공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1월 16일 고니시 유기나가라는 왜군대장이 이 성에 주둔하였다가 2월에 부산성이 수복되자 곧 그 곳으로 옮긴 듯하다는 것이다.

    이 왜성은 기장에서 유일하게 1963년 사적 제52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재는 사적에서 제외키로 함에 따라 제외되었다가 1997년에 부산시 기념물 제48호로 다시 지정되었다.

     신라토성

    신라토성

    위치 :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웃마을 뒤편 언덕을

    찾아가는 길 : 기장읍 죽성리

    소개

    기장읍의 생활사를 담은 '읍지'(邑誌)에는 '죽성고적은 두모포진상에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기장읍 죽성리에 있는 웃마을 뒤편 언덕을 옹산이라 하는 이곳에 오래된 성지가 있다. 이 옹산의 서쪽을 일직선으로 깎아질러 보면 바로 토성이 있다.

    이곳을 살펴보면 지금도 토축된 흔적이 완연하게 남아 있다. 신라시대의 토성으로 알려져 있는데 언제 축성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아니 여기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래서 이 토성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이 신라토성 근처에는 국가 사적 이기도 했던 죽성왜성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앉아 있다.(왜성부분 참조) 이 왜성을 연구하기 위해 지금도 일본에서 학자들이 이곳 죽성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토성은 언제 어떻게 어떤 목적으로 축성되었는지 조차 모른 채 방치되어 있다. 우리나라가 지난 세월동안 얼마나 우리의 역사에 무관심했던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다. 이 토성의 역사를 밝혀내고 제 값어치를 찾게하는 일은 이제 자라나는 우리 후세들의 과제다.

    우리가 답사여행을 통해 얻는 것은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지식을 쌓는데도 있 지만 잊혀지고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번 답사여행을 통해서도 우리역사의 가져진 부분, 알려지지 않은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남산봉수대

    남산봉수대

    위치 : 신천마을에서 봉대산 정상까지 40분소요

    찾아가는 길 : 신천마을에서 하차 봉대산 정상까지 40분소요

    소개

    남산봉수대는 나라의 변란이 일어났을 때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신호하여 중앙으로 알리는 옛 통신시설의 하나로 봉수대끼리 잘 보이는 산정에 원봉과 간봉을 두고 있다.

    남산봉수대는 봉대산의 가장 높은 곳에 둥글고 높게 돌로서 단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뾰족한 산봉우리처럼 만들어져 있어 멀리서 봐도 그 모습이 수려하다. 해발 228미터에 불과하지만 동쪽은 벼랑처럼 급경사로 이루어져 있다.

    남산봉수대는 서기 985년에서 서기1454년 이전에 설치되었고, 경상지역 봉수대로 간봉 제8호로서 남쪽에 있는 부산시 해운대구 장산의 남쪽 산봉우리에 있는 간비오산 봉화대에 알리고, 장안읍 임랑리 뒷산에 있는 임랑봉화대로부터 통보를 받고, 또 알리기도 하다가 임랑봉화대가 없어진 뒤에는 장안읍 고리 뒷산에 있는 아이 이길봉수대와 연결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때 모두 폐지된 것이다.

    봉수대의 봉군은 200명으로 되어 있다.봉수군의 직제는 도별장 1명을 두고 그 밑에 다시 별장 10명 내지 5명, 감고 1명, 봉군은 100명씩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불빛과 연기의 숫자에 따라 위급한 정도가 정해져 있었고 비나 궂은 날씨로 신호가 불가능하면 봉수대를 지키던 군사가 릴레이식으로 다음 봉수대에 알렸다.

    고려 성종 4년(985년)에 설치하여 고종 31년(1894년) 갑오경장때 폐지되었지만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편이다.중앙의 봉돈은 2.4미터, 지름 9미터의 돌로 쌓여 있으며, 높이 1.5미터, 너비 1.5미터, 지름 30-40미터의 화로가 있었으나 이제 돌무더기는 거의 없어졌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 130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재지정되었다.

     이길봉수대

    이길봉수대

    위치 :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효암리 산51-1일대.

    찾아가는 길 : 마을버스(기장3) : 효암에서 하차(약800m지점).

    소개

    월내에서 효암으로 가는 고갯길의 정상을 넘어서면 남쪽으로 이길봉수대로 가는 길이 나오며 걸어서는 15분정도의 거리로 숲과 초원의 오솔길이 있는데다가 전망이 좋아 걷기에 참 좋은 곳이다. 이 유적은 해안을 따라 침입해 오는 왜적들의 동향을 중앙으로 알리는 통신시설의 하나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하되 일정하게 조직된 봉수망을 따라 전달되었다. 불빛과 연기의 숫자에 따라 위급한 정도가 정해져 있었고 비나 궂은 날씨로 신호가 불가능하면 봉수대를 지키던 군사가 뛰어가서 다음 봉수대에 알렸다.

    전국의 봉수망은 크게 다섯 갈래의 원봉이 있고, 원봉에 연결되는 간봉이 있었는데 간봉은 주요 봉수망으로 각처의 군사정보를 알리는 곳이이었다. 경상도 지역에는 원봉 34개소에 90개의 간봉이 있는데, 이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다. 이곳에서는 동쪽으로 기장남산, 북쪽으로는 가리봉산의 봉화대가 연결되었으며, 경주지역을 거쳐 중앙으로 연결되었다.

    봉수망은 고려시대에 정비되고 조선 세종 때에 완비되었는데 이곳도 세종 때 봉화대를 만들던 규칙과 일치하고 있다. 중앙의 봉돈은 높이 2.4m , 지름 9m의 돌로 쌓은 것으로 그 바깥으로 높이 1.5m , 너비 1.5 m , 지름 30m쯤의 돌로 쌓은 담장과 지름 40m쯤의 담장이 바깥과 구분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곳에는 오장과 봉졸이 배치되어 교대로 지켰다.

    각처에 남아있는 봉수대들 가운데 비교적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는 곳 가운데 하나이다. 1987년 5월 19일 경상남도 도지정 기념물 제 84호로 지어되었다가 1995년 3월 1일 부산광역시로 편입되면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 38호로 재지정 되었다.

    이길봉수대는 문화유산의 해를 맞은 1997년 국고보조사업으로 원형에 가깝도록 복원되었다.

    이에 따라 붕괴된 중앙 봉돈과 주변 내, 외 석축이 보수되었다.

    고리원전

    위치 :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고리

    소개

    고리원자력 발전소는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생산기지로서 원자력을 통한 자연과 인간의 이익을 도모 할수 있는 환경과, 우리나라 전력 생산의 구조와 과정을 보다 이해하기 쉽도록 전시 및 교육시설을 설치해 두고 일반인들에게 항상 개방되어 있다.